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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학부생 생존기 - 2. 첫 수업의 슬픈 기억

루루루 0 297 04.01 02:04
quelle: Freepik

오리엔테이션을 무사히 마치고 개강 첫날 들 뜬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습니다. 물에 젖어 바닥에 진흙과 달라붙은 낙엽도 마치 제 레드카펫인 것 마냥 아름다웠습니다. 가방안에는 대학 붙었다고 새로 장만한 공책과 필기구가 눈 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었습니다. 새 공책 훗. 깐지나는 독일어로 가득 채워 주겠어.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여유있게 헤헷 풋내기들이 얼마나 모였나하고 강의실을 찾아갔는데 그 호수가 없더군요. 응? 물어봐도 어차피 다 신입생이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일은 학과건물이 도시 곳곳에 분산되어 있어서 정신을 모으지 않으면 낯선 곳에서 처음보는 친구들과 다른 세상 얘기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첫날부터 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건물이 아니었던 거죠.

어리석게도 그 때 제 학과동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구글 지도 보고 캠퍼스 배치도 보고 부랴부랴 헐레벌떡 꼴딱꼴딱 찾아가 이미 닫혀있는 강의실 문을 열고 아무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들어가 앉았습니다. 늦게왔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없어. 여긴 오이로파니까. 첫날인데 90분 수업을 다 하더군요. 여기서 1차 멘붕이 왔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학시험 통과했다고 수업을 알아들을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학원에서 같이 웃고 떠들고 하던 중국인 친구가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아 그리운 벗이여. 너도 어딘가에서 외로워 하고 있겠구나.. 교수님은 PPT도 없이 90분동안 쉬지않고 유창한 독일어로 무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앉아만 있으면 시간은 흐르는 Vorlesung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차 멘붕은 Seminar에서 몰아쳤습니다.

Seminar에 갔는데.. 갑자기 학생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간 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지구 밖 어딘가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그래도 외계인들이랑 결국 좋게좋게 풀리던데 여긴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식은 땀에 등허리가 촉촉해 졌습니다. 누가 제발 나에게 시나리오를 줬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알고보니 그 외계인이 저였더군요. 모든 학생이 한 번씩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더니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알아 들었습니다.

"손 안든 사람!"

도대체 손 왜 들어야 되냐고! 오메 답답한 거. 그렇게 손을 들지 못한 채 수업이 끝났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잽싸게 학생들을 스캔했습니다. 제 모든 촉을 풀가동해서 제일 공부 잘하고 착하게 생긴 학생을 찾아내기 위함이었죠. 그리고 강의실을 벗어나려는 그 친구에게 달려가 부탁했습니다. 나 뭔소린지 모르겠다고, 모르는 거 물어보고 싶은데 연락처 좀 알려줄 수 있냐고 말이죠. 아마 그 친구도 황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역시 촉이 제대로 였던 듯 흔쾌히 연락처를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굉장한 친구였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고 일단 그 친구한테 이게 조를 짜는거라고 이야기를 듣고 다시 허겁지겁 강의실에 들어가 교수님께 아까 무슨 소린지 몰라서 손을 못들었다고 말씀드리고 한 테마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그 수업은 일단락 되었죠.

그러고 집에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업 끝나고 야자하러 가는 기분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내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금방이라도 흩날려 사라질 거 같았습니다.  하늘이 참으로 높구나. 내 속도 모르는 공원의 잔디는 가을에도 왜이리 푸르른가. 생명력이란 무엇인가..이래서 독일에 철학자가 많은가 싶었습니다. 참으로 쌀쌀한 10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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